HARDENING, 내성 강화, 내성 교정, 경화. 마당 한켠에 심은 덩쿨식물을 보노라면 그 대단한 생명력에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의아리, 시계꽃, 종꽃, 나팔꽃. 겨울에는 땅속에 휴면하여 있다가 봄에 햇볕을 만나고 적당한 물을 받으면, 그리고 물론 기대어 클 만한 다른 식물을 잡으면 하루에 20센티도 자란다. 외계에서 온 별처럼 빛나는 의아리꽃은 정말 특별한 존재이다. 인동초를 키워보면 가냘퍼 보이는 이 식물이 겨울에는 녹색을 잃고

HARDENING and PRUNING 굳이 번역하자면 경화, 즉 내성강화와 가지치기쯤 되겠다. 식물을 키울 때 타고난 좋은 형질을 강화시키고 약한 성질을 강하게 변형시키는 게 하드닝이다. 더 좋은, 많은 열매를 맺고, 더 크고 풍성한 꽃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게 전지, 즉 가지치기이다. 집안에 화분을 하나라도 키워 본 사람은 모두 경험하는 일, 때때로 분갈이뿐 아니라 이파리를 솎아주고 웃자란 가지를 쳐주어야 화초가 더욱 튼실하고

잘 먹는 아이, 잘 자는 아이, 잘 누는 아이, 잘 노는 아이. Normal Child. 노멀 촤일드. 보통 아이. 깊이 따져보면 잘 자고, 잘 먹고, 잘 누고, 잘 노는 아이가 최상의 아이라고 생각한다. 겸손하게 ‘보통 아이’라고 부르자. 선남선녀 부모들의 고민의 대부분은 아이가 잘 못, 안 자고, 잘 못, 안 먹고, 잘 못, 안 누고, 잘 못, 안 놀아서 생긴다. 이 네

20년 독일 생활 마치고 한국에 나와 임상의로 일한 지가 한 20년 된다. 학부부터 독일의대를 나왔기에 소속 대학, 선후배가 없어서 마치 텃밭에 끈 떨어진 된박처럼 혼자 구르면서 20년이 훅 지나갔다. 스스로 대견하여 기념으로 올리브 나무를 한그루 집에 들여놓았다. 계단참에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 Der Baum des Lebens)’  그림 앞에 세워 놓고 ‘이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보니 제법 그럴싸하다.

눈보라와 맹추위가 기승부리던 어느 3월 초 앙상한 가지뿐인 철쭉나무 밑에 꼬맹이 수선화의 잎새가 나왔다. 몇 년이나 땅속에 있던 구근이 살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영락없이 꽃을 피울 모양이다. 몇 주 지나서 수선화가 꽃을 내더니 작년에 해거리한 목련이 진달래, 벚꽃도 피기 전에 먼저 꽃망울을 내보였다. 기후변화가 심하니 보니 꽃들도 제 나름의 질서를 새로이 정렬하는 것이리라. 어김없이 아이들은 콧물, 기침, 열과 설사에 다시 스멀거리는

우리가 목련을 기다리는 이유는 마치 갓난 어린아기가 걷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던 아이가 뛰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뛰어가면서 넘어지던 아이가 공을 차게 되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공을 차고 자전거를 타게 되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엄마, 엄마가 아빠, 까까, 젤리가 되고, 시어시어, 아냐아냐가 치킨이 되고, 띠라노사우루스가 되고, 파란 상어가 카보트, 티니퐁이 되고 카카오 스토리가 되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2024년을 돌아보고 마무리하는 며칠이다. 올해 초에는 학교에 입학하는 아기들에게 책을 한 권 씩 선물한 게 기억에 남는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나온 사이언스 키즈라는 종합잡지인데 백삼십여권 사서 나누어 주었다. 아무리 우리가 IT에 인터넷 세상에 살아도 문어를 모르면 안되고 문해력이 떨어지면 언어 이해력도 자연 떨어지니 ‘글자’를 그림과 같이 보면서라도 가까이 해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비록 고루하게 여길 수 있으나 나름 ‘학교’라는 길고 험한

아이들과 어울려,돌보며,살피며 살다보면 가슴에 진하게, 쉽게 말하면 ‘짠하게’ 와 닿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어둔다. 인터넷세상이 좋은 점은 이런 것이다. 사진을 찍어두고 가끔 보면서 각성하고 자성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1. 두고 간 아기신발 한짝 마우스만한 신발.많이 걸어서 때가 묻은 아기 첫신발. 어찌나 맘을 움직이던지… 헤밍웨이의 문구가 떠올랐다.(가장 짧은 ‘소설’이라는 과대포장에 시달리는 하이쿠적인 문구라는게 약간 불경스러운 내생각,ㅎㅎ) For

예성이와 크리스마스 트리

탈도 많던 코로나 세번째해 2022 도 저물어간다. 3은 어디서나 좋은 숫자, 이렇게 마무리가 되면 좋겠지 싶은 마음이다. 2020,2021년에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학교도 줌도 선생님도 급식도 태권도학원도 모두 뒤죽박죽 제대로 된것 하나없이 마스크 쓴 자기얼굴만 어색하게 익히며 시간이 갔다. 다행히 올해 2022는 마스크를 쓴채이지만 대면수업을 했기에 학교라는 시스템을 체득했으니 다행이다. 올해 3월 초등학교입학후 몇주후, 늘 그렇듯 아침마다 배아픈 아기들이 병원출입이 는다.

모유 수유가 좀 특별한 사건이 되어가는 세상이다. 어찌 변하는 게 이뿐이랴만, 변화가 모여 진화가 되기도 하니 섣부른 감정적 판단은 배제할 일이다. 다만, 분유를 선호하면서도 초유 밀, 초유 첨가 분유, 초유 사탕, 초유 첨가 우유, 심지어는 초유 첨가 음료수도 나온 걸 보면 초유라는 개념이 거의 맹신의 대상이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과연 이것도 얄팍한 상술일까? 하나나 혹은 간신히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