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육

6월 20, 2019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훈육은 무한사랑과 배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쁘고 귀한 내 아이가 다른 이에게도 이쁨받고, 사회에서 귀하게 대접받을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게 부모의 할 일인가 싶다.

때론 간신히 뒤집기를 하는 어린 아기가 하던 짓이 커서도 계속되면 부모의 고통이 커지는 일도 있다. 잘 때마다 손가락을 엄마 귀에 넣고 꼼지락거리며 자는 아기가 있다고 하자. 돌이 지나 아장아장 걸으면서도, 잘 때는 엄마가 옆에 누워서 귀를 대어주면, 손가락을 엄마 귀에 쑤셔 넣어야 잠이 들거니와, 밤에도 손가락이 빠지면 화들짝 깨어서 엄마를 찾아 어떻게든 손가락을 엄마 귀에 넣어야 다시 잠이 든다. 과연 엄마가 잠을 잘 수 있을까? 엄마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잡아당기며 자는 아기를 상상해보라. 두돌이 지나서도 엄마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칭칭 말아야 자고, 아니면 동네가 떠나가게 소란을 피운다고 생각해보라. 또한 놀이방에서 수시로 친구를 피맺히게 물어버리는 두 살배기, 갓 태어난 동생을 시샘하여 배를 밟고 서 있는 세살짜리도 있다. 쇼핑을 하러 가서는 원하는 장난감을 안 사주었다고 바닥에 드러누워 소리 지르며 울고불고 한편의 쇼를 제공하는 네 살배기도 있다. 놀이터에 가면 순서를 무시하거나 자기보다 어린아이를 괴롭히고 밀고 차는 다섯 살배기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놀이방, 어린이집, 유치원 등의 유아 보습 교육기관 종사자들은 모여있는 아이들이 어리면 어릴수록 정글에 더 가까운 작은 사회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특히 아이들이 어릴수록 더 그렇다. 걸어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사회화 과정에 있는 한 살, 두 살, 세 살배기 아이들은 언어보다는 감정으로 소통하는 사회생활을 한다. 그때 그야말로 동물적 본능으로 우월한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좌충우돌한다. 물론 개개인의 편차는 크다. 성품이 온화한 아이는 외부에서 정해주는 규칙을 내면화하여 조화롭게 커가고, 격정적인 아이는 한계를 시험하듯 이리저리 부딪친다. 언어 이해 능력 발달, 인지 발달 속도와도 상관이 있다. 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닌 개성의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할머니의 얼굴을 때리는 세 살배기, 친구에게 침을 뱉는 두 살배기, 걸핏하면 엄마를 물어뜯는 아이, 남의 손에 들린 장난감은 무조건 뺏는 아이를 앞에 두고, 크면 다 알 거라고, 학교에 가면 저절로 안 할 거라 생각하며 내버려 두는 것은, 제대로 가르쳤을 때 배울 수 있는 것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사람은 선악을 내재한 동물이다. 아이도 그렇고 어른도 그렇다.
부모의 절대적 관심 속에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 부모의 보살핌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아이들이다. 육아 다음에는 교육이다. ‘교’자가 앞에 나온다. 교육에는 수저를 들고 밥을 먹는 것과 배변훈련은 물론이요, 미끄럼 탈 때 순서를 지키는 것도 포함하고, 식당에서 제자리에 앉아있는 법도 들어간다 (유·소아 단체생활의 장점은 공동소유,질서, 포기, 협동 등 사회생활의 기본을 배우는 것 같다). 학교생활의 성공을 만점짜리 받아쓰기나 기말고사 성적에 제한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누구나 인터넷을 사용한다. 사회생활의 성공과 개인의 행복이 일류대, 일류기업인이었던 시대가 지나갔다. 감성적 친화력, 사회적 융화력, 지도적 장악력 등 이미 가정에서 부모에게 보고 배운 바로 그 ‘자질과 능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대가 우리 시대.

내 자식이 내게 이쁜 만큼, 남에게도 이쁨을 받고, 속해있는 작은 사회에서 작게 크게 신뢰를 받는 구성원으로 키우는 것은 모든 부모의 바람이다. 어린 자식의 어리고 작은 잘못들을 관심과 사랑으로 고쳐주어야 한다. 관심 있는 부모가 자식을 나무란다. 애가 자기를 행여 싫어할까 봐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슬쩍 넘어가거나, 그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거나, 다른 이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장기적으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친구를 밀고 때리고 물고 장난감을 뺏는 아이는 친구가 없다. 결국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이 아이 본인, 그러나 아이는 어리기에 자기 행동의 결과를 알 수 없으므로 부모가 가르치고 타이르고 훈육을 하는 것이다. 우발적 실수나 무지의 실수, 의도적 실수를 부모가 사랑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지적해주고 가르치는 아빠와 엄마에게서 자란 아이는 점점 더 큰 사회로 진출하였을 때 남의 잘못에도 관대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 경험도 이겨나갈 마음 근육이 단단히 쌓여있는 것이다. 혹간 아이들을 자연성에 맡기어 스스로 깨닫게 두자는 의견도 있고, 훈육의 부정적 결과로 정신적 폐해를 들먹이기도 하는데, 훈육과 학대는 마치 신발과 책상처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이다. 아이의 자기애적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부모가 암묵 방치하는 것을 무한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 아이에게 집착하여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할 만큼 일거수일투족 규정을 지어 전시용 아이로 만드는 소유적 태도의 결과는 동일하다. 불행한 아이가 되는 것. 불행한 아이는 불행한 아이를 속에 품고 껍질만 어른으로 자란다.

(어제 우리 은규가 누나의 플루트를 입에 물고 넘어져 구강에 큰 상처가 나서 왔다. 착한 누나가 동생이 달라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치웠는데, 굳이 쫓아가서 뺐어 달아나다가 그만 사고가 났다. 평소 여지없이 진땀 나게 말 안 듣는 미운 세 살)

‘엄부자모’라는 이상이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엄격한 아버지, 자애로운 엄마.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양부모가 육아든 훈육이든 일관성있고 절도있게 상황에 적합하게 아이를 키우면 될 것 같다.

우리는 이미 AI 시대에 살고 있다. IQ 시대가 지나갔고 EQ 시대를 거쳐, SQ 시대가 도래했다. 부모의 진정한 관심과 사랑 어린, 절도 있는 훈육이야말로 우리의 아이들이 이 복잡한 시대를 살아나가는데 꼭 필요한 단단한 마음 근육을 키워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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